본문 바로가기

문화와 연결하다/컬쳐&트렌드

작사가가 이야기하는 가사가 좋은 노래


 작사가가 이야기하는 가사가 좋은 노래 





제가 작사를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일기를 쓰거나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반 친구들 앞에서 직접 쓴 일기를 읽어줄 정도로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책의 인상 깊은 구절,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모든 감정을 시시콜콜하게 다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빼곡히 기록한 노트가 20권이나 됐고, 운 좋게도 시집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시집을 읽은 작곡가 김형석 씨를 만나면서 작사가로서의 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슬픔의 카타르시스



  

신승훈의 <I believe>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표현한 곡입니다. 이 곡을 작사할 당시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와 한창 연애 중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낚시 여행 중이었는데, 작곡가 김형석 씨에게 급하게 곡을 받아 낚싯대를 걸쳐놓은 채로 쓴 가사죠. 작사는 곡이 먼저 나온 후 흥얼거리는 가이드 곡을 듣고, 작사가가 그 음에 따라 가사를 넣으면 완성됩니다. <I believe>는 듣자마자 아련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깊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닌, 희망이 있는 아픔이었습니다. 헤어진 남자 친구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지금 사랑하는 남자가 떠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며 가사를 완성했습니다.

 

임창정의 <Love affair>는 동명의 영화를 보고 쓴 곡입니다. 워렌 비티가 아네트 베닝을 기다리는 창가에서 “지금쯤 올 때도 됐는데!” 하는 대사에서 가사가 생각났고,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은 그동안 써온 일기장에서 “사랑한다는 말 아껴둘걸”이라는 한 줄에서 나왔습니다. 
작사가들은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 헤어진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 작사가는 그 말을 대신해 주며, 사람들의 슬픈 감정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 줍니다. 노래가 주는 슬픔이 카타르시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사가인 나 또한 지극히 통속적인 노래 가사 때문에 거리에 멍하니 서서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예리하게 상처 난 곳을 건드려 아픔을 상기시켜 주는 가사. 그 한 소절이 간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슬퍼지기 위함이다. 자신의 슬픔에 아름다운 이유를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큰 슬픔이 찾아와 나 대신 한숨을 쉬어주는 느낌도 듭니다.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 하는 안도감에서 외로
움이 줄어들죠. 


  


노을의 <전부 너였다>라는 노래는 『황진이』라는 책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도 그대와의 한 달간의 만남과 바꿀 수 없다”라는 대목이 노래 가사로 탄생된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랑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의 가사도 황진이의 시조를 번안한 곡이니 말이죠. 아마도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단 사랑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가요의 역할은 우리의 인생을 위로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가사의 한 구절이 가슴에 꽂히는 순간 노래는 따뜻한 담요가 되어 가슴을 덮어주고, 때론 손수건이 되어 눈물을 닦아줍니다.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문고리



   

재수하던 시절, 학원 가 홍대 거리에선 항상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흘러 나왔습니다. 가끔 이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아, 그 더운 날 나는 고생해서 재수 생활을 했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래는 신기하게도 빠르게 그 시절의 나로 되돌려 놓습니다.


 “조성모의 <To Heaven>이 나왔던 그때 말이야!” 하며 친구들과 얘기하면 소통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수백 수천 가지입니다. 각자의 기억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래는 오감을 넘어서 육감을 자극합니다. 노래를 들으며 추억의 어느 장소에서 맡았던 커피 향도 떠올리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앨범도 꺼내듭니다. 여행 가서 들었던 노래가 나를 다시 바닷가로 데려다 주고, 엄마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들으면 엄마의 체취를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 노래는 이렇게 인생의 어느 한순간을, 나아가서는 지난 시대를 대변해 줍니다. 우리가 노래를 찾는 이유는 감정의 극대화에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설렘을 캐럴에서 느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가사는 계절, 시간, 장소, 물건, 날씨, 메뉴, 스타일까지 꼬집어 주며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작사가로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딱 내 얘기야!”입니다. 백 명이 듣는 한 곡의 가사보다 한 사람이 백 번 듣는 가사를 쓰고 싶은 것이 작사가의 욕심이죠. 가장 보편적인 진실이 담겨 있어 보편적인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가사. 유치하고 통속적이라 하더라도 듣는 입장에서 주파수를 맞추기 쉽다면 써야 하는 것이 대중가요를 만드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삶을 지탱해 줄 응원가



  

노래는 달콤한 우울함에 빠지게도 하지만 순식간에 행복한 공기를 만드는 마술을 부리기도 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샤워하다 흥얼거린 노래를 하루 종일 이어 부르다가 공연히 기분이 들뜬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고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본래 노래에는 주술적 의미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왕이 나타나길 바라며, 비가 내리길 바라며, 음을 넣고 동작을 넣었던 것이 최초의 댄스곡이 아닐까요. 요즘 유행하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참가자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고 있지 않나요. 


“어려운 시절, 이 노래를 부르며 힘을 냈어요. 이제 이 노래를 무대에서 펼칠 수 있게 됐네요.” 살면서 맞닥뜨리는 희로애락의 순간들. 취향에 따라 골라 들을 수 있는 수많은 대중가요가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 또한 가장 막막한 시절에 노래를 통해 위로 받았습니다. 그 시절을 견디게 해준 노래는 윤상의 <한 걸음 더>였으니까요. 




잠깐 동안 멈춰 서서 머리 위 하늘을 봐


우리 지친 마음 조금은 쉴 수 있게 할 거야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그리 복잡하진 않아 




가사를 보세요. 이 얼마나 일차원적인 줄긋기인지요. 하지만 그 당시 줄곧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나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힘겨웠던 시절을 노래를 통해 구원받으며 작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제가 작사한 노래 가사를 들으며 그때 그 시절의 저처럼 위로 받길 바랍니다.




출처 : 아주캐피탈 사외보 좋은날 (글. 양재선)


양재선은 트렌드를 아는 작사가입니다. 가수 신승훈, 성시경, 임창정, 이수영의 히트곡들과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개인의 취향>, <아이리스>의  OST를 작사했습니다. 2001년 KBS 가요대상 작사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파라다이스 티켓> 뮤지컬 극작가로도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