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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연결하다/컬쳐&트렌드

말보다 더 강렬한 말, 그라피티로 말하고 듣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면서 누구에게나 자기표현의 욕구를 일깨워 주는 그라피티. 그라피티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그림으로 말합니다.  거리 미술의 원조인 뉴욕에서 공공의 적이었던 그라피티가 이러한 소통을 통해 공공의 친구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뉴욕에서만이 아니라 런던과 브리스틀에서도 함께 합니다.

 

 

낙서의 역사에서 시작하는 그라피티

 

 

 

 

낙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3만 5,000년 전의 동굴벽화는 서양미술사에서 인정한 공식적 인 낙서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시인들은 어떤 금기나 제약도 없이, 간단하고 강력하게 자신들의 원망(願望)과 가치를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들은 지금의 우리가 그린 낙서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얼마 전, 독일의 베르너 헤어조크 (Werner Herzog) 감독의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 (Cave Of Forgotten Dreams)>에 나오는 그림처럼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거대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라피티를 포함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술을 포괄적으로 ‘거리 미술 (street art)’이라고 부릅니다. 거리 미술의 원조는 1970년대 전후로 전성기를 구가한 뉴욕의 그라피티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반항적이었던 청소년들이 지하철과 담벼락, 슬럼화되는 상가 주변에 스프레이로 이름을 남기는 정도였지만, 이중 독특한 그림들은 화상들의 눈에 띄어 주류 미술계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 도시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히 철거, 단속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옳습니다.

 

 

낙서화에서 예술로, 앤디 워홀에게 영향 받은 그라피티 작가들 

 

 

 


미국과 유럽에선 낙서화의 번성과 함께 그것이 ‘예술인가, 범죄인가’ 하는 논쟁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정부와 미술계는 늘 극단적으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정부가 낙서화의 위법성을 강조하며 단속에 나선 반면, 미술계는 예술의 한 장르로 취급하며 미학적 논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키스 해링(Keith Haring)이나 장 미셸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 같은 스타 작가를 배출하였습니다.

 

뉴욕 지하철 벽에 낙서를 하다가 유명 작가가 된 이 두 작가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존경하던 예술가가 앤디 워홀 (Andy Warhol)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에게 맞장을 떴고, 그의 인정으로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미술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17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화가가 되겠다고 가출했습니다. 해링은 피츠버그의 예술전문학교와 뉴욕의 시각예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제도권 미술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퇴했습니다. 그렇게 두 작가는 처음부터 주류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거리를 무대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 작가의 등장은 뉴욕의 미술을 위험하고 활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타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들은 안타깝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거리의 삶처럼 언제라도 폐기 처분될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 입니다.

 

 

그라피티 작가아트 테러리스트에서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미국의 두 스타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거리 미술은 침체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해 거리 미술이 영국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지로 나타난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뱅크시 (Robert Banksy) 입니다.

 

그는 인터넷 상에서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쥐 그림으로 유명세를 탄 인물입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곤 도망쳐야만 하는 낙서 자체가 지닌 불법성, 게다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뱅크시는 특히 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도시 여기저기에 그리고 다녔습니다. 영국 최대의 할인점 ‘테스코’ 깃발에 거수경례하는 꼬마들,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구석기인 등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비판하는가 하면, 아이까지 검문하는 경찰, 최루탄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 키스를 하는 동성애자 경찰 등 예민한 사회 문제를 건드렸고, 전쟁과 폭력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입장도 보여줬습니다.

 

뱅크시가 유명해지고 작품 값이 오르자, 그가 그려놓은 낙서화를 지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 벽을 도장하면서 그의 작품만 남겨놓고 페인트를 칠하는 기현상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의 작품들은 그려지자마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투명 플라스틱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트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던 뱅크시는 영국에서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된 것입니다.

 

예술의 금기를 깨고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그라피티

 

 


그라피티 예술가들, 어쩌면 그들의 예술은 사회 저항의 의지를 의도적으로 표명했다기보다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애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들은 정치적으로 유명해지기 위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세상,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행복한 세상, 그야말로 유토피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 복잡해지고, 통제 당하고, 억압되는 것이 많아지고 있는 세상에서 이런 그라피티 예술만큼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없습니다. 갤러리나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퍼블릭 아트가 된 키스 해링의 천진난만한 아이 조각이나 뱅크시의 유머러스한 벽화들은 그나마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공해줍니다. 위트 있는 작품과 선동적인 문구로 예술의 금기를 깨버린 작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술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출처 : 아주캐피탈 사외보 좋은날 (글. 유경희)
유경희는 미술 잡지의 기자로 미술계에 입문, 큐레이터로 전향해 수년간 화랑에서 일하다가 뉴욕에서 예술 행정을 공부했습니다. 현재는 미학과 예술론을 가르치는 한편, CEO를 위한 특강 등 대중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술 혹은 예술 작품 그 자체보다는 삶이 하나의 예술인 것에 매혹을 느끼며 평론가로서도 활동 중입니다.